[2026 험프리스③]젤렌스키가 부러워할 ‘한미동맹의 상징’ 주한미군
다음달 22일이면 러시아가 ‘특별군사작전’ 명목 아래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한 지 만 4년이다.
러시아는 1994년 미국 영국과 함께 우크라이나의 핵폐기를 조건으로 안전보장을 한다는 ‘부다페스트 각서’를 써줬던 당사자다.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10여년 전 크름반도 합병에 이어 이번 '특별군사작전'으로 우크라이나 국토의 20% 가량을 점령한 러시아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중재에 나서고 있는 휴전 협상에 소극적이다.
전황이 유리하다는 판단에서다.
지난해 10월 말 미국은 러시아가 점령하지 않는 곳까지 내주는 평화조약안을 만들었다가 유럽과 우크라이나의 강력한 반발을 샀다.
트럼프는 “대국 러시아에게 승리할 수 있냐”며 우크라이나에게 사실상 항복을 하라면서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만족할 만한 안전보장 방안은 내놓지 않고 있다.
서유럽 국가들은 대러 최전선 우크라이나를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존재로 인식하고 돕기 위해 ‘의지의 연합’을 결성했지만 전후 나토 체제 속에서 미국의 보호 우산 아래 전력이 약화돼 독자적으로 러시아를 막기에는 아직 버겁다.
젤렌스키는 트럼프가 푸틴과 뒷거래를 모색하는 듯한 우적(友敵)의 경계가 모호한 안개 속에서 국가의 존망과 국민의 안위를 도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한반도는 어떤가.
미-중 패권 경쟁,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한 북-러 군사 밀착에 다카이치 총리의 ‘대만 유사사태’ 발언으로 인한 중-일 분쟁까지 겹치면서 한반도는 새해부터 거친 3각 파도속에 들어섰다.
올해 한반도의 안보 현실을 가늠해보기 위해 지난달 17일 평택 개리슨 험프리스를 방문해 둘러보면서 줄곧 머리를 떠나지 않은 것은 다소 엉뚱하지만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손에 든 젤렌스키가 이곳에 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였다.
1953년 체결된 한미방위조약은 미국이 현재 유일하게 맺고 있는 양자 동맹조약이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6·25 전쟁 휴전 협상 국면에서 ‘동맹 조약 불가’를 고집하던 미국을 돌려세워 협상에 나서게 하고 조약 서명 후 비준까지도 1년이 걸리는 진통 끝에 조약을 ‘쟁취’했다.
이승만은 휴전에 반대하며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강수까지 두었고 미국은 이승만을 군사쿠데타로 축출하는 ‘에버레디 계획’까지 세웠다 접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조약에 가조인 한 뒤 이승만은 “조약으로 안보를 확보해 번영을 누릴 것이며 여러 세대에 걸쳐 혜택을 받게 될 것”이라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그의 말은 후의 한강의 기적과 민주화로 이어진 역사가 증명했다.
젤렌스키가 한미상호조약을 보면 가장 주목할 것은 조약 4조일 것이다.
한국은 미국의 육해공군 주둔을 ‘승인’하고 미국은 이를 ‘수락’한다는 문구다.
미국은 주한 미군 2만 8500명을 올해도 유지하는 ‘2026 회계연도 국방수권법(NDAA)안’을 지난달 통과시켰다.
한미상호조약과 매년 갱신되는 국방수권법안을 통해 유지되는 미군의 한국 주둔 현장이 험프리스다.
이곳에는 미 2사단은 물론 육해공군, 해병대 등 미군 전력과 유엔군사령부, 한미 연합군사령부 등이 함께 있다.
6·25 전쟁 1129일 동안 투입된 육군 9개 사단 중 미국 본토에서 처음으로 한반도에 배치된 미 2사단은 휴전 후에도 유일하게 남아 있는 부대다.
전쟁 중 중공군에 ‘인디언 태형’이라는 군우리 전투의 굴욕을 당했지만 중과부적 지평리 전투에서 설욕하는 등 곡절을 겪은 2사단은 세계 최대 해외 미군 기지 험프리스의 주축이다.
험프리스의 ‘2사단 박물관’에서는 1917년 창설 이래 절반 이상을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2사단이 한반도와 동북아 안보의 중추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정전 협정 후속으로 창설된 유엔사는 16개국 공동 선언에 따라 한반도 전쟁 재발시 전력을 제공하기로 했다.
조영진 유엔사 군사정전위원회 전 수석대표(예비역 소장)이 최근 언론 기고에서 지적한 것처럼 “유사시 국제사회의 자동 개입을 보장하는 강력한 전쟁 억지력”이다.
험프리스 내부에 들어서면 ‘워커 드라이브’ ‘맥아더 서클’ 등 영문 안내판만 보인다.
미국인지 한국인지 헷갈린다.
이곳 우편번호가 캘리포니아 한 지역의 것을 써서 ‘미국 땅’이냐고 비난하는 해프닝도 있었다고 부대 관계자는 소개했다 젤렌스키가 보면 눈에 훅 들어올 한 구절은 험프리스 내부 도로 옆 물탱크에 새겨진 ‘파이트 투나잇(Fight tonight)’이라는 구호다.
주한미군 미 육군 제2보병사단의 공식 구호로, 한반도 유사시 즉각 전투에 돌입할 수 있는 대비 태세를 상징한다.
“오늘 밤 갑자기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의지로 외치는 것이다.
젤렌스키가 러시아와 휴전에서 요구하는 핵심은 두 가지다.
불법 침공으로 점령당한 영토 양도 불가와 안전보장이다.
6·25 이후 정전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한반도에는 일본(5만 3000명), 독일(3만 5000명)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미군이 전후방 8개 기지에 주둔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재침공 방지를 위한 최선의 장치는 평화유지군이든 뭐든 어떤 명분으로라도 나토 등 제3국 지상군의 주둔일 것이다.
미군이 한 명이라도 포함되기를 바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젤렌스키가 한미상호조약과 험프리스를 보면 우크라이나에는 무망(無望)한 것들이다.
젤렌스키는 지난해 2월 말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트럼프에게 “당신은 카드가 없다”며 ‘멜로스의 대화’에서 익숙한 말까지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간절히 원하는 안보의 조건 상당수는 이미 험프리스에 구현돼 있다.
그렇다면 한반도는 안전한가.
북한은 지난해 크리스마스에 김정은이 8700t급 핵잠수함을 시찰하는 사진을 공개했다.
한국이 추진하는 5000t 보다 핵무기 탑재 능력, 연료 교체 불요 등에서 성능이 앞설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무력 고도화가 정점을 향해 가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해 발표한 국가안보전략(NSS)에서 동맹의 자강과 자립을 재차 강조했다.
한미상호조약 6조는 ‘상대국에 조약 종료를 통보하면 1년 후 효력이 종료된다’는고 규정으로 끝난다.
6·25 때도 미국은 전황이 불리해지자 한반도 철수를 3 차례나 검토했다.
대만에는 ‘의미론(疑美論)’이 있다.
중국 침공 시 미국이 얼마나 대만을 지켜줄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과 불안이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에서 미국이 일본의 한반도 지배권을 인정했다는 해석은 지나친 비약일 수 있다.
다만 키신저가 했던 ‘국제정치에서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다.
국가이익만이 있을 뿐이다’는 말은 트럼프의 미국, 아니면 그 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각자도생의 시대를 맞아 한국의 안보도 한미방위조약과 험프리스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고민이 비슷하다는 말을 젤렌스키에게 해줄 수 밖에 없다.